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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조선시대 돈의문(서대문) 복원에 대하여

역사를 찾아야 나라가 산다.

등록일 2024년01월25일 08시54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 철거 이전의 돈의문 -

 

돈의문은 한양도성의 서쪽 대문이란 뜻이다. 대한민국은 조선왕조가 남긴 유산위에서 건국되었다.   

 

식민지로 근대화가 되었으나 조선왕조 500년 역사를 지울수 없다. 

 

선조들이 주자학으로 공리공론하다가 상무정신을 잃어버려 조선왕조의 대세가 기울어지기는 하였으나. 방대한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 일기는 세계 어떤 나라도 흉내내지 못한 기록문화유산이다.

 

대한민국의 국어로 상용하는 세계적인 표음누자인 한글은 누가 만들었나?  

 

나라가 망했다고 절명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민초가 일어나서 의병운동을 일으킨 나라는 중원왕조에는 찾아 볼 수 없다.

 

구한말의 군대도 그리 허약하지 않았고 신식무기도 용산 병기창에 갖추었다. 

 

문제는 시운이 불리했다.

 

미,영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하여 일본편이 되었고, 일본이 청일,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국제정치적으로 일본의 강탈을 제어하고 조선독립을 지원해줄 만한 주변국이 사라진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었다.

 

이런 때에 일본이 치밀하게 군사권 외교권을 박탈해갔고 조선왕조는 왕권을 중심으로 이러한 책략에 저항하는 방론을 세우고 집행하는 국력동원 체계가 미비했다는 것이다. 

  

한양은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뿐만 아니라 2천년전 한성백제 부터 시작해서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왕조에서도 중시한 명당처이었다.

 

미래가치를 보더라도 서울은  세계의 수도로서 번창해 나갈 천년복지이다.

 

서울에 현대식 빌딩숲만 우거져 있다면 이것이 자랑스러운가? 

 

경복궁 복원작업은 겨우 3분의 1을 마쳤다.

 

북경의 자금성, 동경의 황궁처럼 세계에 내 놓아도 손색없는 과거 현재 미래가 어울어진  역사고도 문화도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명 서대문으로 불리는 돈의문에 대해 서울시가 복원을 추진하기로 했다.

 

돈의문은 일제 시대인 1915년에 도로 확장과 전차가 다니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철거됐다.

 

서울시 계획에 따르면 2026년까지 정동사거리 인근에 있는 돈의문박물관마을을 철거해 공원으로 만들고, 2035년까지 새문안로 약 400m 구간(서울역사박물관~강북삼성병원)을 지하화하고 돈의문을 복원하겠다는 것이다.

 

서대문인 돈의문 터가 서대문구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종로구 평동 112번지에 위치한다.

 

동대문인 흥인지문도 동대문구에 있지 않다. 흥인지문 역시 현재 종로구 종로6가에 있다..

 

돈의문(敦義門) 뜻은 ‘<義를 두텁게 하는(敦) 문>’이다.

 

義자는 전통적으로 서쪽을 가리켰기 때문에 돈의문 이름 뜻을 '서쪽을 두텁게 하다'로 해석하기도 한다.

 

실제로 한양 도성에서 돈의문말고도 서쪽에 있는 문들에는 다 '義' 자가 들어가 있다.

 

사소문(사대문 사이사이에 있는 작은 성문) 중 창의문(彰義門, 서북문), 소의문(昭義門, 서소문) 등이다.

 

돈의문이 처음 세워진 곳은 지금의 자리가 아니다.

 

1396년 한양의 2차 성곽공사를 마무리할 때 8개 성문(사대문 4곳과 사소문 4곳)을 지었는데, 돈의문도 이때 세워졌다. 

 

당시 위치는 지금의 독립문 근처 사직동 고개쯤에 있었다.

 

하지만 태종 13년에 풍수적으로 돈의문의 자리가 좋지 않다고 주장하여 돈의문이 폐쇄되었다.

 

태종은 대신할 문을 어디에 세울지 의정부에 명하여 찾게 했는데, 이때 태종의 대표적 권신인 안성군 이숙번의 집 앞에 있는 옛길을 따라서 문을 세우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자 이숙번은 상왕 정종이 기거하는 인덕궁 앞 작은 동네가 길을 새로 내어 문을 설치할 만한 곳이라고 다른 의견을 내자 조정이 그대로 따라 서전문(西箭門)을 세웠다.

 

세종 4년(1422)에 세종은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오늘날 신문로 언덕 위에 새롭게 문을 세운 뒤 이름을 옛날과 같이 돈의문이라 하였다. 

 

가까스로 살아 남은 '흥인지문' 세월이 흘러 일제강점기인 1915년, 일제는 경성을 개발하며 전차궤도를 복선화하려 했는데, 돈의문이 방해가 되었다. 

 

총독부가 처음에는 전차 코스인 흥인지문까지 모두 헐기로 했으나, 흥인지문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입성한 문이라는 이유로 헐지 않고 문 양쪽 성벽만 없애 전차 노선을 유지했다.

 

그렇게 약 500년 간 서쪽 대문 역할을 하던 돈의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철거된 돈의문의 기와와 목재는 경매에 부쳐 염덕기라는 사람에게 205원(현재 시세 200만원)에 팔렸다.

 

철거과정에서 돈의문의 편액(현판)만은 남았는데, 창덕궁의 행각에 보관해 오다가 현재는 한양도성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김덕순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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